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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연인, 모나코의 사랑이 되다

그레이스 켈리&레니에 3

왕관을 쓴 자 그 무게를 견뎌라! 할리우드 여배우에서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의 이야기다. 1950년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배우 그레이스 켈리와 레이니 3세와의 결혼은 전 세계 사람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완결판이었다. 왕자와 결혼한 신데렐라는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을까?



1950년대 할리우드의 전설

그레이스 켈리가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기간은 5년남짓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전설로 남아 있다. 이는 배우로서의 커리어도 있지만 그녀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 덕분일 것이다. 우아하고 기품 있는 이미지와 달리 그녀는 화려한 스캔들을 몰고 다니는 주인공이었다. 다른 형제, 자매에 비해 부모의 관심을 적게 받았던 그녀는 유부남 배우와 스캔들이 날 만큼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도 있었다. 열아홉 살, TV에 출연하던 시절에 만났던 마크 밀러를 시작으로 감독이었던 돈 리처드슨, 그리고 진 라이온스 등과 연인 관계였던 그녀는 <하이 눈>에서 공연한 게리 쿠퍼를 시작으로 레이 밀랜드, 빙 크로스비, 윌리엄 홀든 등 작품을 같이한 배우들과 데이트를 즐겼다. 스캔들로 배우 경력이 끝날 것을 두려워한 켈리는 결혼 대신 낙태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한 기회는 곧 찾아왔다.

그레이스 켈리는 1955년 칸영화제에 초청받았고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인 모나코를 방문했다. 당시 <파리마치>라는 잡지의 편집장이 모나코 궁을 배경으로 한 화보 촬영을 제안했고, 켈리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미혼 남성이었던 33세의 레니에 3세 왕을 처음 만났다. 할리우드 여신을 보고 첫 눈에 반한 레니에 3세는 적극적으로 구애했고 12캐럿 다이아몬드로 프러포즈를 했다.


신데렐라 스토리의 진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세기의 결혼이 사실은 필요관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우리들의 꿈을 깨는 것일까? 진실은 당사자들만 알겠지만 이 두 사람의 결혼이 정략적이었다는 말이 많았다. 이 시기 모나코 왕실은 1918년 조약에 의해, 레니에 3세에게 직계 후계자가 없으면 프랑스로 귀속되어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는 꾸준히 신붓감을 찾고 있었던 것. 또 당시 모나코는 주요 돈벌이 수단이던 관광산업이 주춤하며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 왕실 차원에서 관광사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왕실의 일원으로 유명 미녀를 스카우트하는 것을 전략적으로 검토하고 있었다. 레니에 3세에게 켈리와의 결혼은 이 두 가지 숙제를 모두 풀어줄 해결책이었던 셈이다. 처음 물망에 오른 것은 켈리를 비롯해 오드리 헵번, 메릴린 먼로 세 명이었다. 오드리 헵번은 벨기에 태생이라 초강대국 미국의 지지를 이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있었고, 할리우드 섹스 심벌로 불린 메릴린 먼로의 경우 왕비가 되기에는 품위가 부족했다. 고심 끝에 가장 왕실과 적합한 인물인 그레이스 켈리가 선택됐다는 것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켈리와 12캐럿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았다는 사실로 배 아파 하는 여성들이 많았을 터. 그레이스 켈리는 이 반지를 끼고 영화 <상류사회>에 출연, 청혼을 수락했다. 레니에 공과의 결혼은 벼락부자 아일랜드계였던 그녀의 가문이 신분 상승을 할 기회였고, 결혼 전 문란한 남자관계를 지속하던 그녀는 처녀성 검사까지 한 후 레니에와 결혼하며 200만 달러라는 거금을 지참금으로 챙겨가 신데렐라의 동화를 현대에 구현했다. 레니에 공에게 청혼받을 당시, 켈리는 <백조>라는 영화에 출연 중이었다. 신기하게도 그 영화에서 그레이스가 맡은 역할은 공주였다. 그레이스는 그 영화를 찍으며 정말로 공주가 되었고 그녀의 동화 같은 이야기는 미국 소녀들의 로망이 되었다. 그레이스 켈리가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에게 2달러를 선물 받은 뒤 모나코 왕비가 됐다는 일화 때문에 그 후로 2달러가 행운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왕비가 된 은막의 여왕
1956년 4월 18일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레니에 3세와 그레이스 켈리는 무려 일주일 일정으로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유럽 전통 방식으로 모나코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치러진 이들의 결혼식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 중 하나로 손꼽힌다. 결혼식이 열리는 동안 유럽 전역이 축제 분위기를 이어가며 결혼을 축복했고, 이들은 지중해에서 7주 동안 요트 허니문을 즐겼다. 그레이스 켈리는 결혼식에서도 배우로 쌓아온 이미지를 고스란히 살려줄 만한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이때 입은 웨딩드레스는 훗날 로열 웨딩의 기준, 우아함의 극치, 클래식 웨딩드레스의 독보적 아이콘 등 세기의 웨딩드레스로 기억된다.

MGM 영화사의 코스튬 디자니어 헬렌 로즈가 제작한 그레이스 켈리의 드레스는 A라인으로 퍼지는 실루엣이 아닌 튤립 봉오리가 연상되는 볼륨 형태로 그녀의 우아하고 격조 있는 아름다움을 잘 표현했다. 모나코는 예상대로 세기의 결혼식 이후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았고, 그레이스 켈리 또한 유명세와 매체를 이용해 국가적 위기 상황을 알려 국제 여론을 모나코 편으로 만들기도 했다. 1957년에 캐롤린, 1958년에 알베르, 1965년에 스테파니를 낳으며 자신의 임무를 다한 그녀는 언젠가는 배우로 컴백하겠다는 희망을 품었지만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나코 왕실은 켈리가 다시 배우로 사는 걸 싫어했고, 이런 점에서 그녀는 힘들어했다. 답답한 궁정 생활과 자식들의 막장 행각 (피는 못 속이는지 세 자식들은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능가하는 화려한 스캔들을 자랑했다.) 등으로 그녀의 말년은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1982년 9월 13일, 차가 그만 산비탈로 굴러떨어지는 사고가 났다. 같이 타고 있던 스테파니 공녀는 가벼운 부상만 입고 살아남았지만, 켈리는 치명상을 입고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다음 날인 9월 14일 향년 5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모나코 왕자와 사랑에 빠진 최고의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는 할리우드 스타를 비롯한 전 세계 유명 인사들을 일제히 모나코로 찾아오게 했다. 이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작은 나라에 불과했던 모나코를 관광국으로 거듭나게 한 계기가 됐다. 진실이 무엇이든 그레이스 켈리와 레니에 3세의 만남은 여전히 세기의 결혼식으로 회자되고 있고, 그레이스 켈리는 오늘날까지 모나코의 가치와 왕실의 위상을 드높인 왕비로 기억되고 있다. 

디자인하우스 [MYWEDDING 2014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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