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대학을 다니던 시절,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다니게 된 욤비 토나. 그곳에 목사의 딸이지 지금의 아내가 된 넬리가 있었다. 그녀를 보기 위해 주말이 되면 교회에 빠지지 않고 가려고 늘 노력했다고. 열 살이나 어렸지만 그녀의 마음 씀씀이는 성숙했다. 넬리 역시 교회를 빠지지 않던 그가 오지 않는 날이면 아픈 건 아닌지, 버스비가 없어서 못 나온 건 아닌지 늘 걱정하며 그를 챙겼다. 그렇게 이들은 3년을 친구로 만나다 연인으로 발전해 사귀었다. 하지만 결혼은 쉽지 않았다.
“콩고의 결혼 문화는 남자의 부가 중시되기 때문에 돈이 없으면 결혼을 못한다고 보면 됩니다. 결혼하기 위해서는 여자 쪽 집안에서 원하는 금액과 혼수 목록을 정리하고 모두 받아야 결혼이 성사되거든요. 결혼하기까지 금액이 올라가기도 하고 집이 가난한 남자는 금액을 깎기도 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집안끼리 합의가 되면 주민 센터에서 공식적으로 확인 절차를 밟게 된다. 남자에게 돈은 받았는지, 혼수 또한 모두 받았는지 확인한 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런 결혼 문화를 따르기에 욤비 토나는 가난했고 그의 사정이라면 결혼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넬리의 아버지는 돈도 혼수도 없이 이들의 결혼을 허락했다. 목회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잘못된 결혼 문화를 답습할 수 없다고 생각하신 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그런 장인이 아니었다면 아마 결혼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하는 그. 열세 살에 형과 부모님과 헤어진 후 처음 맞는 가족이었던 그녀는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존재였다.
성공회대 아시아비정부기구학 석사 졸업식에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위)콩고에서 같은 디자인으로 나눠 끼었던 반지. (아래)콩고에서 탈출하며 잃어버린 것이 아쉬워 그 반지와 가장 비슷한 디자인으로 한국에서 구매했다.
믿음은 사랑을 굳건하게 만든다
콩고에서 작은 왕국을 다스리는 왕족의 아들로 태어난 욤비 토나. 성인이 돼서는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의 비밀정보국에서 요직을 맡았던 그는 정권의 비리를 알아채고 최대 야당인 민주 사회진보연합에 이 사실을 전달하려다 발각돼 체포됐다. 비밀 감옥에 수감돼 갖은 고초를 겪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한국에 들어왔다. 지금은 광주의 한 대학교에서 자율융복합전공학부 교수로서의 삶을 살고 있지만 처음 2002년 한국으로와 난민 인정을 받고 가족들을 만나기까지 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가 아픔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내와 두 아들과 딸은 정글로 도망가 4년을 숨어 살며 그의 소식만을 기다렸다.
한국 국적의 여자와 또다시 결혼하면 비자가 나와 한국에 보다 쉽게 정착할 수 있었지만, 그는 가족들을 버릴 수 없었다. 그의 아내는 언제나 욤비 편에서 그를 지지했고 믿음으로서 결혼을, 또 사랑을 지켜가고 있었다. 그 역시 자신보다 그들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그 고난의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다.
“비밀 요원으로 위험한 일을 할 때에도, 한국에서의 난민이라는 신분으로 어렵사리 살아갈 때에도 늘 저를 신뢰하는 아내가 옆에 있었죠. 언제나 저에게 믿는다고 말해주었어요. 그렇기에 힘을 낼 수 있었어요. 아내의 믿음이 없었더라면 아마 모든 것이 불가능했을 거예요.”
(욤비 토나) “남편이 가는 길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게 믿었죠. 확신했기에 두렵지 않았어요.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남편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같아요.”
(욤비 넬리) 결혼은 서로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된다는 이들 부부. 6년 동안 더없는 고통을 겪으면 서도 이를 잘견뎌낸 이들 부부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어 가능했고 앞으로도 그 굳건함으로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믿음으로 지켜낸
욤비 토나 부부의 사랑
고국을 등진 남편이 한국으로 떠난 4년 동안 정글에서 생활하며 오직 그만을 기다려온 아내 욤비 넬리. 난민 인정까지 6년, 가족과 함께할 날만을 꿈꾸며 갖은 고통을 견뎌낸 남편 욤비 토나. 이들이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서로에 대한 믿음 덕분이다.
디자인하우스 [MYWEDDING 2014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