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과 땅이 맛닿은 하늘연못 한가운데서 그들은 하나가 된다. 차이 김영진의 한복은 동서양의 만남. 자연과의 일치다. 신부는 전통 한지로 만든 소색 한복에 조바위를 쓰고, 신랑은 16세기 안동 김씨 가문의 저고리와 쓰개를 재현해 입었다.
비 온 다음 날이라 마치 파스텔로 그림을 그려놓은 듯 청명한 가을 하늘이다. 하늘과 땅이 만난 곳, 제주돌문화공원 하늘연못. ‘홍신자 시집가는 날’이란 이름으로 이곳에서 열린 결혼식은 공연과 예식이 어우러진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하객들이 연꽃차茶를 나누며 시작된 결혼식에서 홍신자 선생이 만들고 이끄는 ‘웃는돌 무용단’의 신부 들러리 줄리엣과 권영임이 꽃잎을 뿌리며 춤을 췄다. 제주대학교 금관 5중주단의 ‘그대가 있는 곳까지’ 연주곡에 맞춰 소국, 쑥부쟁이, 으아리 꽃잎들을 뿌렸다. “와~” 하객들의 환호와 함께 한복 디자이너 김영진(차이김영진 대표)이 지은 소색 한복에 조바위를 쓴 신부와 한지로 만든 한복을 입은 신랑이 양쪽에서 하늘연못을 건너와 만났다. 사회를 본 송순현 정신세계원 대표는 “동과 서, 남과 북, 자연과 예술, 사랑이 아주 조화롭게 꽃핀 환상적인 공연” 이라며 오늘이 한글날이라 더욱 의미가 깊다고 귀뜸했다. 하객들은 미리 나눠 준 ‘한글날 노래’ 악보를 보고 한목소리로 부른다.“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 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온 겨레. 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 새 세상 밝혀주는 해가 돋았네. 한글은 우리 자랑 문화의 터전.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노래를 따라부르던 하객들도 신이 났다. 신랑 베르너 삿세 교수는 독일인 최초의 한국학자로 유럽한국학협회 회장을 지냈으며 ‘월인천강지곡’을 독일어로 처음 번역한 학자다. 결혼식에 한글날 노래를 부르자는 생각은 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닐까. 이 결혼의 중매자인 노은님 화가, 디자이너 진태옥ㆍ한혜자ㆍ권형민, 사진작가 베르나르 크루거ㆍ김보하, <삶과 꿈> 발행인 신갑순, 쇳대박물관 관장 최홍규와 수많은 하객들. 그녀의 명성은 국제적이어서 하객들 중에는 외국인들의 모습도 눈에 많이 띄었다.

(왼쪽) 전국에서 모여든 하객들이 1300m2 규모의 하늘 연못가에 둘러 서서 꽃잎을 뿌리며 춤추는 들러리들과 신랑 신부가 만나는 퍼포먼스의 절정을 본다.
홍신자를 변화시킨 거대한 능력, 사랑. 신부를 맞는 환한 신랑의 얼굴을 보니 눈물이 주르륵, 가슴을 소용돌이치게 만드는 순간. 권형민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신랑이 하늘연못 무대 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신부를 맞는 얼굴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나왔어요.”그러자 나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저도 바로 그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는데!” 한 사람은 무대에서 먼 단상 끝에서 하늘연못을 보았고, 또 한 사람은 무대 바로 앞쪽에서 보았다. 비록 한 공간에서 본다 해도 무대와 떨어진 거리가 다르고 각도가 다르면 사람마다 눈으로 받아들이는 그림, 영상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눈으로 다른 것을 보았는데 같은 순간에 같은 것을 느꼈다. 말없는 단순한 몸짓이 사람을 울게 할 수 있다는 것도 감동이었지만, 이 결혼이 단지 시각에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하게 알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사랑. 홍신자는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 설화가 있는 제주돌문화공원에서 결혼하기로 한다. 설문대할망은 굶주린 아들 오백 명의 배를 채우기 위해 자신의 몸을 끓는 죽 솥에 던졌다. 이것은 비워내고 채워내는 끝나지 않는 헌신과 이해로 순환되고 연속되는 어머니의 사랑. 제주돌문화공원의 백운철 원장은 지난 9월 9일 오백장군갤러리 개관 특별 공연으로 홍신자 선생의 무대를 올렸다. 그 인연으로 이곳에서의 결혼식을 제안하게 됐다. 지금 보니 이 하늘 연못을 홍신자 선생의 결혼식을 위해 만든 것 같다”고 말했다.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 신화 속에 묻혀 하늘연못을 걷는 곱게 화장을 한 신부 홍신자는 마치 설문대할망의 부드러운 속눈썹을 사뿐히 밟고 있는 기분이었을까.

“신랑은 “두 달 전 독일 헤센의 옛 성 부르크 슈타우펜베르크에서 가족끼리 상견례 모임을 했는데 오늘 제주도에서 전통 평양식으로 결혼하니까 더 의미가 새롭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기쁘지만 남과 북의 만남이자 동과 서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국토 남단 제주에서의 10월 9일 한글날 올리는 평양식 전통 혼례라 더 뜻깊지요. ” 또 신부는 “우리 존재의 본질은 바로 사랑. 어머니의 사랑이 아닐까요.”한다. 잔칫집에 국수가 없어서는 안 된다. 전통 혼례가 끝나고 피로연이 이어지고 300여 명의 하객들은 하늘연못 이곳저곳에 자유롭게 앉아 국수와 순대를 곁들인 막걸리를 먹고 마시며 즐거워진다. 즐거워지면 자신과 남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여유가 생기니까 더 행복해진다.


1 남과 여, 동양과 서양의 만남, 예술과 자연 그리고 사랑과 결혼의 신성함이 조화된 환상적인 공연에 하객들은 환호를 그치지 않았다.
2 결혼식 퍼포먼스의 사회를 맡은 정신세계원 송순현 대표. 그를 홍신자 선생은 ‘봄날’로 부른다.
3 하늘연못에 걸린 청사초롱.음과 양, 남과 여를 뜻하는 청사초롱으로 손님을 맞이하고 안내할 때 주로 쓰던 것이다. 청색은 음, 홍색은 양을 뜻한다.
4,5 신부 들러리인 ‘웃는돌 무용단’ 권영임의 춤추는 모습. 왼쪽 페이지 퍼포먼스를 마친 후 하객들에게 신랑 신부가 인사를 올린다.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그녀의 결혼식에는 수많은 하객들이 몰렸다.
Love Story
첫째는 잘생기고 박식한 신랑이 무용가인 한 여인에게 구혼을 하는 이야기입니다. 2년 전 처음 재독 화가 노은님의 서울 전시에서 삿세 교수를 보고 홍신자는 노은님 화백에게 대뜸 “저 사람이 내 남편”이라고 말했다는데 정작 이 일을 홍신자는 그 순간 까맣게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작년 11월 두 사람이 노은님 화백을 통해 담양에서 다시 만나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남자는 점차 여인의 마음을 얻어갑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결혼하기로 합니다.
둘째는 담양에 사는 남자를 깊게 사랑하는 순결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남자가 그녀의 마을을 지나면서 그녀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그녀의 특별한 아름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을 훔치려고 합니다. 사랑이 그 안에 있고 그녀도 그 사랑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문화평론가 조우석 은 지난 10월 1일자 중앙일보 자신의 칼럼에 홍신자 선생과 삿세 교수의 청첩장을 보고 이렇게 닭살 돋는 청첩장은 처음이라고 밝혔다. 커플끼리의 사랑을 과시한 ‘Love is Play’ 라 적힌 청첩장을 요리조리 보며 한참을 웃었다며. 봉투부터 ‘베르너 삿세♡홍신자’로 돼 있는데, 안에 담긴 카드는 날아갈 듯한 붓글씨로 제목이 달려 있다. ‘홍신자 시집가는 날.’ 잘 보니 홍신자 이름 석 자에 나비 한 마리가 살포시 앉아 있고. 꽃을 본 나비라는 뜻이리라. 카드 안쪽을 여니 ‘춘향가’의 그 대목처럼 서로 업고 노는 그림이 펼쳐진다. 벙실 웃고 있는 신랑, 그 넓은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수줍은 신부. 뒷장은 둘의 뽀뽀 사진으로 마무리한다.


1 축하 공연이 열리는 동안 신랑 베르너 삿세는 어느새 새로이 단장하고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 71세 신부, 홍신자도 곱디고운 꽃가마에 올랐다. 주례는 하객을 향해 옆이 훤히 뚫린 누드 가마라고 말해 한바탕 크게 웃었다.
2 태풍이라 불리는 말을 타고.
3 그녀의 어머니가 그리도 원했던 화장도 예쁘게 한 신부. 포에버 웨딩의 고상희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박샘 미용실의 박은영 원장이 신부 홍신자를 정성스레 단장했다. 그리고 간다. 드디어 홍신자…시집간다. 주례인 박정욱 대표가 그렇다고 독일까지 데려가진 말아달라고 말하자 큰 웃음 바다가 되었다.국토의 남단 제주에서 평양식 혼례. 남과 북의 만남을 의도했던 것일까.
전통 혼례傳統婚禮
전통 혼례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지역마다 예법이 다소 다를 수 있다.
의혼議婚 신랑 집과 신부 집이 서로 혼사를 의논하는 절차다. 신랑 신부의 가문, 학식, 인품 등을 조사하고 궁합을 본 다음 허혼 여부를 결정한다. 대개 신랑 집의 청혼 편지에 신부 집에서 허혼 편지를 보내 의혼이 이루어진다.
납채納采 혼약이 이루어져 사주를 보내고 연길涓吉을 청하는 절차다. 신부집에서 허혼 편지를 받은 신랑 집에서 신랑의 사주와 납채문을 써서 홍색 보자기에 싸서 보낸다. 신부 집에서 결혼 날짜를 택해 신랑 측에 통지하는데 이것을 연길이라고 한다.
납폐納幣 연길을 보낸 뒤 신랑 집에서 결혼식 전날 신부용 혼수와 혼서지, 물목을 넣은 혼수 함을 보낸다. 이것을 납폐라고 하는데 혼서지는 신부에게 소중한 것으로 일부종사의 의미. 일생 동안 간직했다가 죽을 때 관 속에 넣어준다. 혼수 함을 보낼 때 신랑 집에서 봉치떡을 정성껏 쪄서 보낸다. 백자에 물을 담고 미나리를 띄운 정화수를 준비한다. 시루째 마루 위에 있는 소반에 갖다놓고 그 위에 혼수 함을 올려놓았다 가게 한다. 함을 가지고 가는 함진아비는 아들을 낳고 내외간의 금실이 좋은 사람으로 선정한다. 함진아비는 신부집에 들어가기 전에 바가지를 깨고 들어간다.
친영親迎 이튿날 오늘날의 결혼식을 의미하는 친영이 있으니 ‘장가간다’는 말의 원형이요, 친영에도 전안례, 교배례, 합근례의 순서가 있는데 신랑이 기럭아비와 함께 신부 집에 도착하여 신부 어머니에게 기러기를 드리는 예를 전안례라 한다. 이는 한 번 연을 맺으면 짝의 연분을 지키는 기러기를 드리며 백년해로할 것을 서약하는 것이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에게 절을 올리는데, 이를 교배례라 한다. 이는 인사로써 몸으로 예를 표하는 깊은 뜻이 있다. 또 술잔과 표주박에 술을 부어 마시는 의례인 합근례를 치른다. 술잔에 마시는 술은 부부로서의 인연을 맺는 것, 표주박으로 마시는 술은 부부 화합을 각각 의미한다. 친영 후 신부 집에 머문 다음 시댁으로 간다.
폐백幣帛 친정에서 보낸 음식과 술로 시어른들께 새 식구로서 첫인사를 드리는 것. 이것이 폐백이며 폐백 음식에는 밤, 대추가 빠지면 안 된다. 밤, 대추는 자손 번성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친정에서 보내는 음식이 ‘이바지’이다.



1,3 드디어 초례청 앞의 신랑 신부. 교배례를 올린다. 모든 신부는 아름답다지만 이날 홍신자는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였다. 박정욱 대표는 신랑을 위해 춘포를, 신부를 위해 80년 전 신부가 입었던 원삼을 직접 정성스레 입혔다. 신부의 베일은 생사. 포, 원삼 모두 박정욱 전통의례연구소 작품.
2 독일인 한국학자 베르너 삿세 교수. 지난 9월 29일 서울 제3스튜디오에서 웨딩 앨범 촬영을 했을 때 촬영한 컷. 담양의 한옥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한국학자답게 갓과 두루마기가 잘 어울린다.
4 하늘연못의 결혼식 전 야외 리셉션 자리에서 하객들에게 대접한 향긋한 연꽃차.
5 평양식 전통 혼례복을 입은 홍신자. 영화 <천녀유혼>의 왕조현도 울고 갈 정도로 아름답다.

(오른쪽) 마침내 신부가 뒤풀이에 모습을 드러냈다. 노랑저고리에 분홍치마. 리본 장식의 천진한 오렌지색 베일을 썼다. 차이 김영진의 작품. 홍신자 선생이 보고 또 보고 특히 아낀 옷. 항상 자유롭게 웃고 우는 감정 표현을 좋아한 그녀. 카비르의 시 ‘무제’ 벗이여 살아 있을 동안 그를 찾으라를 애송하는 분.
차이 김영진이 만든 노랑저고리에 분홍치마로 갈아입은 홍신자는 신랑과 손을 꼭 잡고 피로연 자리에서 하객들과 일일이 인사를 한다. 뉴욕에서 20년 이상 존 케이지, 유지 타카하시, 백남준 등의 아티스트와 함께 작업해온 그녀.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파티 등의 행사에 참석하면 서양인들은 하나같이 서양의 미녀 사이에 있는 그녀를 보고 “뷰티풀!”이라고 말했다. 유년 시절 그녀는 검은 무명 몸빼에 분홍 인조 치마, 노랑 명주 저고리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등에 가로로 보자기 책보를 멨다. 그것이 그녀가 기억하는 한복 입은 자신의 소녀 시절 모습. 오늘 피로연장의 모습과 흡사하다. 단지 가로로 멘 책보가 없고 꽃 장식 베일을 쓴 것 빼고는.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추억 속에 잠긴다. 이 때 한국인 신부를 보고 독일인 신랑이 외치는 한마디. “오! 뷰티풀” 사람들은 여유로운 담소를 나누는 동안 한글날의 저녁은 그렇게 깊어갔다. 어느덧 어둠이 내렸다. 떠들썩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사람들이 모두 떠난 텅 빈 하늘연못. 나는 어둑한 하늘연못을 바라보며 얼마간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고 싶었다. 하늘에 유독 하나 밝게 빛나는 별은 홍신자 선생의 어머니 별일까. 아버지 별일까.
나는 일행들과 함께 캄캄해진 하늘연못을 빠져 나와 밤샘으로 이어질 뒤풀이 장소인 제주 중문의 일명 ‘창고’로 갔다. 결혼식 뒤풀이 장소인 ‘창고’는 토탈미술관 노준의 관장이 준비한 공간. 이곳에서는 홍신자 선생이 소년이라 부르는 이민규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참으로 눈이 맑은 이 소년은 선생님의 결혼 준비 추진 위원이었다. “제가 선생님이 안성 죽산국제예술제의 예술 감독으로 계실 때 일을 도와드리면서 인연은 계속되고 있습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진 뒤풀이에서 오늘 결혼의 중매자인 노은님 화백의 덕담에 이어 삿세 신랑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선녀를 만났어요. 내 사랑은 선녀처럼 어여쁘고 어여쁨니다.” 한바탕 웃음. 우리는 한참 동안 먹고 마시며 놀았다. 한복 디자이너 차이 김영진 선생의 한복에 대한 찬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홍신자 선생님하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해요.” 그녀를 통해 자유로운 삶이란 꾸미지 않는, 가식 없는 삶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됐을 무렵했던 말. 새벽이 오기 직전의 적막과 물처럼 흐르는 어둠과 빛. 창고를 떠나면서 그녀를 껴안았다. “사랑합니다. 행복하세요.” 거기엔 이대로 이 밤이 흘러가 버렸으면 하는 영원의 시간이 있었다. 그녀의 눈은 소녀의 그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아이의 티없는 눈동자였다. 오늘 캄캄해진 하늘연못에서 본 빛나는 한 개의 별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그리고 춤추고 있는 홍신자 선생 바로 자신이 아니었을까.


1 뒤풀이 시간. 신랑이 신부를 위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바친다. 신랑은 철부지 소녀를 바라보는 열일곱살 개
구장이소년의 모습.
2 뒤풀이에 준비된 와인은 몬테스Montes 클래식 카베르네 소비뇽 2008. 부부는 샴페인으로 건배를 제안했다.
3 신랑신부는 디자이너 차이 김영진의 한복을 입고 지난 9월 서울 압구정동 제3스튜디오에서 웨딩 사진 촬영을 했다. 포토그래퍼는 김보하. 한 곳을 함께 바라보는 두 사람.

사람들…1 ‘소년’이라 불리는 이민규. 신랑 신부의 결혼 추진 위원.
2 재독 화가 노은님.
3 제주돌문화공원의 백운철 원장.
4 웨딩와이즈의 권형민 대표.
5 박여숙 갤러리의 박여숙 관장. ‘웃는돌 무용단’의 권영임, 뒤는 소년2.
6 사진작가 베르나르 크루거와 디자인하우스 이영혜 대표.
7 월간 <마이웨딩>의 김혜진(왼쪽)과 차이 김영진의 대표 김영진(오른쪽). 하늘연못에서의 신랑 신부 의상과 들러리 그리피로연 한복은 그녀의 작품들.
홍신자
<자유를 위한 변명> 홍신자 저, 정신세계사 중에서 요약 발췌
그녀는 숙명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오랫동안의 꿈을 좇아 스물다섯에 뉴욕으로 훌쩍 떠났다. 이때부터 그녀의 순례 인생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호텔경영을 공부하다 우연히 알윈 니콜라이의 무용 공연을 보게 되었는데 “저것이다”라는 깨우침과 함께 운명처럼 무용을 시작했다. ‘우연을 가장한 숙명’으로 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1967년 스물일곱의 나이, 뼈도 굳고 근육도 굳은 늦은 나이로 시작한 춤. 니콜라이 무용학교를 마쳤고, 온몸을 바친 8년의 세월이었다. 뉴욕 예술학교를 마칠 무렵 학교 무대에 올린 실험적인 그녀의 작품을 보고 학장 스튜어드 호디스는 “이제 너에게 더 가르칠 것이 없다”고 했을 때, 마치 검술 스승으로부터 하산을 허락받은 검객처럼 그녀는 비장해져서 눈물까지 핑 돌았다고. 무용 수업을 마치고 그녀의 첫 작품으로 공연한 ‘제례制禮.’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던 언니의 한스럽기만 한 짧은 생애, 언니의 한을 무용으로 풀어보고 싶은 마음으로 만든 춤이 제례Mourning이다. 이 작품을 1973년 3월 신인 안무가를 선발하는 전위 무용 극장 ‘댄스 시어터 워크숍’에 올렸다. 이곳은 세계 실험 예술의 본고장인 뉴욕에서도 정평이 나 있는 곳. 제례는 우리의 전통적인 곡소리를 내는 것으로 시작해서, 장사 지낼 때 하는 일련의 의식들을 변형시켜 구성한 정적인 무용이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한순간에 뉴욕 무용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가 신인 무용가 홍신자의 첫 작품을 이례적으로 호평해주었다고. <제례>는 뉴욕에서만 스무 차례 이상 공연했다.
미국 생활을 한 지 10년 동안 그녀는 전위무용가가 되어 소위 성공이라는 것을 했으며 그리고 잠시 귀국해선 한국 무용계에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는 공연도 몇 차례 했고 그 덕분에 유명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1976년 모든 것을 청산하고 도를 닦겠다며 인도로 또 훌쩍 떠났다. 인도로 떠나기 전날 밤 그녀는 잠자리에서 귓속말처럼 옆에 누운 어머니에게 털어놓았다. “어머니, 저는 뜻한 바가 있어서 내일 인도로 아주 떠납니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나 앉으셨다. 어차피 없었던 자식처럼 품을 떠나 타국에서 산 지가 이미 10년인데, 어머니는 무엇이 또 그렇게 놀랍고 서운하신 걸까. 울기도 하고 그녀를 붙잡고 흔들기도 하며 많은 말을 했다. 떠나는 날, 눈물이 흘러 그녀의 신발 앞에 떨어졌다. 그러고선 어머니를 꼭 껴안았다.
어머니를 떠나 인도에서 구도의 길을 만났다. 두 스승 라즈니쉬, 그리고 니사가다타 마하라지를 만났다. 한국인 최초로 라즈니쉬의 제자가 되었고 구도 체험을 했다. “여기에 와서 수행하라”며 제자로 삼았던 라즈니쉬는 그녀의 춤을 보고 “됐다.

8 재일교포 정영혜(왼쪽)와 디자이너 진태옥(오른쪽).
9 토탈미술관 노준의 관장.
10 국악예술원 가례헌 박정욱 대표.
11 디자이너 한혜자.
12 쉼갤러리의 박기옥 대표(왼쪽), 삿세 교수의 독일인 제자 안톤(오른쪽).
13 웨딩 앨범 촬영과 결혼식 날 촬영을 맡은 제3스튜디오 김보하 실장.
14 전라도 담양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는 이웃. 이영희, 독일인 빈도림 부부.
너는 무용을 그만두어선 안 된다. 너는 타고난 무용가다. 계속해라. 너는 이제 떠나기 바란다. 거리의 춤추는 거지가 되든, 이름 없는 동네의 아낙이 되든, 무엇을 택해도 좋다. 다만 네가 원하는 바에 따르라. 아무 두려움을 가질 것 없다.” 헤어짐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렇게 담담했다. 그리고 무용계로 완전히 복귀했다. 명상과 호흡을 통해 병든 몸도 고쳤다. 그리고 한국으로, 어머니 곁으로 돌아갔다. 머무른 시간은 2년이 채 못 되는 짧은 기간이었는데, 그동안 그녀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칠순을 훨씬 넘긴 어머니는 모처럼 한복까지 예쁘게 차려입고 딸에게 찾아왔다. 그날 주름살이 깊이 패고 그늘이 드리운 어머니의 얼굴에서 고생스럽고 한스럽기만 했던 당신의 인생이 보여서 마음이 안쓰러웠다. 그런 어머니께 평생 못해본 효녀 노릇이나 한번 해보자 싶어, 제일 하고 싶으신 게 뭐냐고 물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 무슨 무슨 영화가 그렇게 슬프고 잘되었다더라 하시면서 영화 구경을 원하셨다. 전형적인 멜로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영화. 영화의 3분의 2가 지나가는 동안 맥 빠진 채로 앉아서 마냥 지루해하고만 있었는데 끄트머리에 이르자 사정이 달라졌다. 가슴이 답답해지더니 눈이 아리기 시작했고, 이윽고 눈물이 흐르는 것이었다. 눈물은 마구 흐르고, 흐르는 눈물을 연신 손등으로 닦으며 훌쩍거리던 그녀는 마침내 목에 둘렀던 스카프를 풀어 얼굴을 훔치고 코를 풀었다. 여기저기서 관객들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참 안됐구나! 저 일을 어쩔꼬!” 어머니는 거푸 그렇게
되뇌면서 마냥 서럽게 우셨다. 어찌나 서럽게 우시는지 이러다 노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지 않나 하는 걱정이 더럭 생겨날 정도였다. 어머니의 어깨를 어루만져서 달래드리고 싶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울음을 삼키기에 바빴고, 목 놓아 꺼이꺼이 울고 싶었기 때문에 그럴 겨를이 없었다. 정신없이 울다가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왔다. 아직 울음의 여운을 가셔내지 못한 채 멈춰 서서, 명암 순응을 위해 부신 눈을 깜박거리고 있는데, 어머니가 대뜸 말하셨다. “배고프다, 얘야. 우리 어디 가서 맛난 것 좀 먹자.” 공을 통통 퉁기듯 명랑한 음성이었다. 뜻밖의 너무도 명랑한 음성에 놀라서 그녀는 어머니를 보았다. 그날, 그토록 엉성한 영화 한 편이 사람을 그토록 심하게 울릴 수 있다는 것 다음으로 불가사의한 것은 어머니의 그 해맑아진 표정이었다. 아까까지 그렇게 서럽디 서럽게 울던 어머니는 도대체 어디로 가셨나 싶었다.
어머니와 팔짱을 끼고 경쾌하게 걷기 시작했다. 극장을 나섰을 때 어머니는 조선시대 여인네로서 평생의 원통함과 억울함을 눈물로, 가슴에 쌓였을 그 숱한 고통일랑 큰 울음, 많은 눈물로 모두 홀가분하게 씻어버리신 건 아닐까. 그녀는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어머니는 그 뒤 1년도 채 못 되어서 저 세상으로 가셨다. 응어리진 가슴을 울음으로 다 풀기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겠지. “제발 화장도 좀 예쁘게 하고, 옷도 좀 예쁘게 입고, 속옷도 좀 자주 갈아입거라. 남같이 사는 꼴 좀 보면 한이 없겠다.”시집가란 말 다음으로 어머니가 자주 하신 말씀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면서 내 손을 억지로 붙잡아 끌고 화장품 가게로, 양장점으로 데려가려 성화를 하시곤 했었다. 길고 긴 타향살이로 당신의 가슴에 못만 박아드린 이 딸이 어머니는 끝끝내 밉지 않으셨던가보다. 헤어질 때면 언제나 문밖에 나와서 배웅을 하셨고, 멀리에서 돌아보면 오래도록 작은 점으로 마냥 서 계시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나는 가시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기 위하여 며칠을 그 곁에 있었다. 눈을 감은 채 혼수상태로 계신 지 9일째 되는 새벽녘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눈을 부르르 뜨셨다. 그러고는 숨을 거두셨다. 나는 손으로 어머니의 눈을 감겨드렸다. 그녀가 저 세상으로 가시는 어머니께 보태드린 것은 그것뿐이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던 날, 그녀는 화장하기를 그렇게 바라시던 어머니 상여 뒤를 곱게 화장한 얼굴로 따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랬으면 어머니는 아마 크게 기뻐하며 떠나셨으리라. 그러나 상심해 있는 다른 사람들의 가슴을 도려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화장품 그릇을 만지작거리기만 했을 뿐이다.
그녀의 유년 시절 관념은, 여자가 결혼을 하면 인생은 거기에서 정지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결혼함으로써 결혼이 무엇인지 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늘 가져야 했던 갈등과 환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임신도 했고 딸 희도 낳았다. 그녀 몸속에 있었고, 그녀 품속에 안겨 있었던 아이. 그녀에게 여자로서의 충만감을 체험하게 해준 딸 희.(이상 <자유를 위한 변명 중에서 (1993)> 홍신자 저 정신세계사)
딸은 그녀에게, 그녀도 딸에게 자유를 주었다.(<나도 너에게 자유를 주고싶다(1998)> 홍신자 저 안그라픽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