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담동 이희영 웨딩꾸뛰르의 입구에는 존 트라볼타의 출세작인 영화 <새터데이 나잇 피버>에 등장하는 디스코 미러볼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다. 1980년대를 풍미하던 디스코 열풍을 상징하는 이 미러볼이 신부들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틀리에 입구에서 눈을 감으니 화려한 조명 아래 디스코를 추고 있는 젊은 존 트라볼타가 떠오른다. 디자이너 이희영의 열정을 다한 젊은 시절이 혹 1980년대가 아닐까 미루어 짐작해보기도. “386(30대 나이, 1980년대 학번, 1960년대 생을 일컫는 말) 세대시죠?”라고 묻자 그녀는 “이제 30대를 넘어 40대이니 386 세대라기보다 486 세대죠. 87학번입니다” 라고 박력 있게 대답했다. “격동의 시대를 사셨군요”라고 덧붙이니 “1980년대 학번의 학생들은 제5공화국 시대에 공부에만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 살았죠. 저는 이화여자대학교 장식 미술학과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패션, 디스코, 의리를 빼고는 저의 대학 시절을 설명하기 어려워요. 특히 높은 굽의 구두도 좋아했는데 10cm가 넘는 웨지 힐을 신고 신나게 디스코 음악에 몸을 맡기며 당시의 여러 가지 걱정들을 날려버리기도 했지요.” 요즘 새로운 패션 아이콘으로 떠오른 스타 서인영과 디자이너 이희영의 공통점은 구두 마니아라는 점이다. “그때는 명동의 유명한 수제화 숍에서 구두를 꼭 맞춰 신었죠. 의상에 맞는 구두를 신어야지 적당한 구두가 없으면 외출하지 않았습니다.”

(왼쪽) 환상적인 비즈 레이스 트레인이 돋보이는 인어 라인 웨딩드레스.
(오른쪽) 힙까지 타이트한 실루엣의 새틴 실크 소재 톱 스타일 웨딩드레스. 입체적인 패턴의 스커트로 디자인에 변화를 주었다. 버슬 스타일의 자연스러운 주름이 특히 우아하다.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도 그의 컬렉션에 맞는 구두를 제작하는 장인의 공방을 소중히 여긴다는 예를 들며 이희영은 디자이너에게 구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강조했다. 직선적인 형태의 가구, 잘 정돈된 실내가 돋보이는 이희영 웨딩꾸뛰르의 상담실을 지나 아틀리에 안쪽 그녀의 방에 앉아 있으니 오랜만에 느끼는 포근함이 밀려왔다. 창밖이 내다보이는 창문 앞 조약돌에 빨간 인주가 묻어 있어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제 분신, 제 사랑, 제 희망인 지민이가 여기서 조약돌을 도장 삼아 노트에 찍곤 해요. 그림 좋아하는 게 저를 닮았나봅니다” 라며 그녀의 책상 옆에 걸려 있는 양 갈래 머리의 귀여운 여자 아이 사진을 보여준다. “다섯 살이에요. 작은 강아지 몽자(마르티스)는 지민이와 함께 있을 수 있지만 정원이 없기 때문에 키우던 큰 개 지몽이(골든 리트리버)를 다른 집으로 입양 보내야 했어요. 그 지몽이가 요즘 아파서 입양 간 집에 날마다 가서 간호를 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밤을 샜지요. 점심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계속할까요? 난시앙의 소룡포(샤오롱바오) 어떠세요?” 그녀와 청담동 이희영 웨딩꾸뛰르에서 나와 3분 거리의 중국집으로 향했다. “소룡포(딤섬의 일종)에서 터져 나오는 진한 국물이 좋아요. 생강채를 얹어 먹으면 상큼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진답니다. 맛있는 것들을 먹으면서 좋아하는 드레스 디자인을 하며 살고 싶습니다.” 큰 사기 스푼에 간장을 묻힌 소룡포를 올려 만두피를 살짝 찢자 진하고 따뜻한 국물이 스푼 가득 찬다. 입속에 진한 국물을 넣으니 잔잔한 행복감이 밀려왔다. “이 맛이야.” 디자이너 이희영의 귀여운 미소를 바라보며 인터뷰하는 시간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제가 존경하는 선배 디자이너 노라노 선생님과 파리 컬렉션에 동행한 적이 있어요. 선생님은 늘 제게 ‘디자이너는 정신력과 체력이 있어야 한다. 살찌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죠. 그만큼 자기 관리와 지구력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70대의 노장 디자이너인 노라노 선생님이 쉬지 않고 파리 곳곳을 누비는 것을 보면 정말 존경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죠. 저도 먹는 양을 서서히 줄여 내년에는 좀 더 날씬해지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유치원에 가는 지민이에게 날씬한 엄마와 디자이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요.” 디스코와 구두를 좋아하던 젊은 날의 이희영은 웨딩드레스, 딸, 개를 좋아하는 여유로운 40대의 디자이너가 되어 있었다.



1 여러 소재의 믹스 & 매치가 돋보이는 드레스이다. 레이스, 실크. 튤망의 조화가 멋스럽다.
2 불가리의 파렌티지 다이아몬드 목걸이 & 귀고리. 웨딩 헤어&메이크업 제니하우스.
3 빅토리아 시대의 웅장함이 연상되는 버슬 스타일 뒷모습.
4 일러스트를 그리고 있는 디자이너 이희영.
5 이희영은 “디자이너에게 자기 관리와 지구력은 매우 필요합니다”라고 말한다.
6 불가리의 엘리시아 다이아몬드 컬렉션 목걸이.
7 그녀가 아끼는 미싱.
8 사진의 오른쪽에 2000년 ‘마이웨딩 디자이너 7인 쇼’ 무대에 선보였던 오리엔탈 무드의 드레스가 보인다.
9 디자이너 이희영의 드레스 일러스트레이션 액자. 일러스트에 소재를 직접 붙여 디자인을 구상하기도 하고 채색을 해보기도 한다. 최근 프라디아에서 열린 그녀의 컬렉션 룩들.
미지의 것을 발견하고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는 사람을 우리는 창의적인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디자이너 이희영은 ‘창의적인 사람’. 그녀는 익숙하지 않은 것을 해내고 다루는 것에 두려움이 없는 것 같아 보인다. 지난 8월 16일 프라디아에서 열린 ‘마이e웨딩 서머 스페셜 웨딩드레스 패션쇼’에 디자이너 이희영이 참여했다. 새로운 형태의 패션쇼였지만 그녀는 적극적이었다. “1993년 ‘마리 앤 리제’란 이름으로 웨딩드레스 부티크를 오픈해 웨딩드레스 디자이너로 살아온 지 16년입니다. 당시 의상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이 웨딩드레스 디자인을 한다는 것은 도전이었습니다. 일상적인 평범한 길은 아니었죠. 그래도 이 길이 제 길이라는 믿음으로 지금까지 달려왔지요.” 그녀는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창의적인 사람이다. 그런 그녀이기에 이번 패션쇼 무대에도 함께할 수 있었다.
“신학자 샘킨Sam Keen은 ‘감사는 에고(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굳어버린 껍데기를 서서히 녹여주는 특효약처럼 작용하여 당신을 관대한 사람으로 바꾸어준다. 감사를 이해하는 마음은 당신이 고결하고 도량이 넓은 영혼으로 자라게 해주는 영혼의 연금술이다’라고 말했어요. 늘 하나님께 감사하고, 주변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려 노력합니다. 이번 패션쇼 무대는 제게 주어진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숍을 오픈한 초기(1993년) 그녀의 디자인은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와 요지 야마모토의 영향을 받아 기하학적이면서 미니멀하고 시크한 포인트가 있었다면, 2000년에 열린 ‘마이웨딩 디자이너 7인 쇼’에서는 오리엔탈에 관심을 두어 드레스에 목단, 매화 등의 자수를 가미, 트래디셔널한 디자인을 선보이기도 했다. 2008년 패션쇼에는 웅가로나 크리스찬 라크르와의 오트 쿠튀르 피날레에서 영감을 받은 빅토리아 시대의 화려한 디자인을 선보이기도 했다. 다양한 소재의 믹스&매치가 돋보였고 어울리는 구두의 코디네이션도 완벽했다. “디자인을 하기 전에 우선 일러스트를 그리지요. 웨딩드레스에 ‘색을 입힌다면 어떤 색이 좋을까’ 상상하면서 채색을 하기도 합니다.” 놀랍게 하루하루가, 한 해 한 해가 빠르게 저물어가지만 디자이너 이희영은 감사할 줄 아는 기독교인이며, 한 아이의 어머니이고, 강아지들의 엄마이자 창의적인 도전자이다. 이제 마침내 웨딩드레스 디자인의 즐거움을 알게 된, 오랜 연륜의, 지혜로운 디자이너 이희영의 상상 속 드레스가 드디어 현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신부들은 그녀의 드레스를 입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것은 행운이다.

(왼쪽) 인어 라인 드레스. 스커트를 이중 소재로 매치해 입체감을 표현한다.
(오른쪽) 튤 소재의 엠파이어 스타일. 시스루 소매가 우아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