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결혼 25주년을 맞아 웨딩 촬영을 한 장광효·길애령 부부. 사랑을 줄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던가. 촬영 준비를 하는 아내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서는 흐뭇한 미소가 내내 감돌았다.
“파리에서 쇼를 하고 좋은 평가를 받으니까 해외 시장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원래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못하고 ‘이거다’ 싶으면 한 가지에만 몰두하는 성격이에요. 매장 운영은 직원들한테 맡기고 파리 쇼, 서울 쇼만 신경쓰다보니 어느 날 엉망진창이 되어 있더라고요. 세 곳만 남기고 3일 만에 27개 매장을 철수했답니다. 회사를 키우는 것도 어렵지만 줄이는 것은 더 어렵다는 것을 실감했죠. 우리나라에 IMF 외환 위기가 오기 전에 저는 IMF 상황이 된 것이지요. 부동산을 처분해서 빚 갚고, 반 지하 작업실에서 2년 반 정도 지내면서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인생이 무엇인지, 가정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죠.”
그랬다. 믿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는 그때, 그의 곁을 지키며 힘이 되어준 것은 다름 아닌 아내였다.

1,2 유럽 앤티크와 한국적인 미감을 좋아하는 장광효 씨의 감성은 인테리어에도 묻어난다. 앤티크 마니아인 그는 10년간 적지 않은 돈을 투자해서 사 모으기도 했는데, 보관 창고 화재로 대다수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고. 그 일을 계기로 앤티크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릴 수 있었단다.
3 오리를 좋아해 집 안 곳곳에 오리 오브제를 놓아두었다.

올해로 결혼 25주년을 맞은 장광효 씨 부부. 아내가 지방 음대 교수로 재직 중인 탓에 내내 주말 부부로 살아온 이들은 대표적인 딩크족(DINK, Double Income No Kids)이다. 양가 부모님들은 “너희들은 언제 같이 사니?” 하며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지만 두 사람은 이렇게 지내는 것에 전혀 불만이 없다. 오랜 시간 함께 생활하다보면 아내가 더 이상 여자로 안 보인다는 말이 있는데, 50세 가까운 나이에도 이들처럼 서로에게 애틋한 감정을 품고 지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디자이너라는 화려한 직업에 종사하다보니 흔히 파티나 모임을 즐기며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지만 작업실과 집을 오가며 지내는 게 주된 일과이고, 퇴근하면 집에서 주부로 변신하죠. 청소나 살림을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 못하는 성격이라 제가 다하거든요. 청소하고, 빨래하고, 식사 준비하고, 순희(4세 된 진돗개) 돌봐주다보면 주부 습진이 걸릴 정도예요.”

1 나전으로 만든 장과 탁자가 집 안 곳곳에 있는데, 리빙디자인페어에서 ‘명성황후의 방’을 꾸밀 때 장인에게 대여해서 쓰려다 그들의 상황이 너무 열악한 것을 보고 구입한 것이다. 1년간 할부로 갚았다고.
2,3,4 그에게 있어 옷, 멋, 디자인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다.
손가락에 물만 통통 튀길 것 같았는데 뜻밖이었다. 게다가 아내가 서울로 오면 “광주 집은 집이고, 여기는 주말 별장이라고 생각하라”며 손 하나 까딱하지 않게 한다고. 그가 광주로 가는 경우도 잦은데, 살림에 서툰 아내를 대신해 우렁각시처럼 집 안 청소를 해주는 것이 정규 코스이다. 평소에도 작업실과 지척에 있는 집만을 주로 오가지만 주말에 그를 불러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처럼 부인 길애령 씨에게만 주말 시간을 온전히 할애하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앞선 감각으로 진보적인 성향의 디자이너와 규범을 벗어나지 않는 보수적인 성향의 음대 교수. 각기 다른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기본적인 성향과 취향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크게 대립한 기억이 좀처럼 없단다. “광주와 서울에서 입는 옷이 달라요. 색상과 디자인이 다소 과감한 것을 권하는데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이 너무 패셔너블하게 입는 것도 보기 안 좋거든요. 그래서 서울에서는 남편의 취향에 맞추고 학교에 갈 때는 단정하게 입는 편이죠. 몸에 딱 붙는 55사이즈 옷을 입으라고도 하는데 그건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1 제주도로 신혼여행 갔을 때 촬영한 사진. 멋쟁이의 면모가 물씬 느껴진다.
2 우리 가곡을 모아 녹음한 길애령 씨의 음반. 범상치 않은 재킷 디자인은 장광효 씨가 한 것이다.
3 4세 된 진돗개 순희. 뜻밖의 순박한 이름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4,5 아내의 제안으로 이탈리아 출신 명 테너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의 이름을 따서 지은 ‘장광효 카루소’. 심플하면서도 파격적인 디자인이 특징이다.
결혼한 것이 천만다행
그가 대학원에 다닐 때 여동생 남편의 소개로 만난 길애령 씨. 그때 결혼을 안 했더라면 지금까지 아마 혼자 살고 있었을 거라는 장광효 씨는 어떻게 저런 여자를 만나게 되었을까 싶어 운명의 여신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사실 인생의 파트너를 제대로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두 사람 간의 감정은 기본이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이해 없이는 지속하기 힘든 관계이기 때문이다. 시댁, 친정은 물론 서로의 친구 관계까지 인정하지 않으면 늘 삐거덕거릴 수밖에 없다.
“결혼 생활의 위기요? 나는 없었는데, 와이프는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디자이너는 자아가 강하고, 경제적인 개념이 없고, 이기적이잖아요. 젊은 시절에는 그야말로 일에 ‘미쳐서’ 살았거든요. “여보, 나 바쁜데 어쩌지?” 하면 제 일을 방해하지 않고 묵묵히 참고 기다려준 사람이죠. 그럴 때마다 노래를 부르면서 자기 마음을 달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인지 요즘에 아내의 음반을 들으면 마음이 아려오기도 해요. 내가 만약 아내였다면 진즉에 이혼했을 것 같아요.“
결혼 예찬론자인 그는 인생에서 결혼은 중요하지 않다, 굳이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남녀가 즐길 수 있고, 혼자 사는 삶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혼자 살면 행복하고 편안한 것도 있지만 둘이 살면서 느끼는 행복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 함께 손잡고 여행 다닐 수 있는 부부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관계가 아닐까? 이들은 5년 전부터 매년 여행을 다닌다. 지난 8월에는 세비야, 그라나다,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리스본 등 스페인의 10개 도시를 돌아봤는데, 서로 챙겨 주는 모습에 함께 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휴양지에서 편히 쉬는 것도 좋지만 문화가 발전한 곳을 다니며 스스로가 작은 존재라는 것을 느끼면 손을 잡게 되어 있어요. 서로에 대한 신뢰감과 믿음이 생기는 거죠. 집채만 한 파도가 와도 손만 꼭 잡고 있으면 끄떡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니까요.”


1 장광효 씨에게는 다른 어떤 명 소프라노보다 아내 길애령 씨의 음색이 더 마음에 와닿는다.
2,3,4 지난 8월 스페인으로 여행 갔을 때 촬영한 사진으로 5년 전부터 매년 부부 여행을 다니고 있다.
epilogue
“느꼈지…, 인생이 무엇인지.”
그와 인터뷰를 하면서 맨 처음 받아 적은 내용이었다. 어이없게도 어떤 물음에 그가 이런 대답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러나 그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뒤 요약되는 한마디였다. 시대를 앞선 디자이너로서, 유명 디자이너로서 화려한 시절 갈피갈피에 남들이 짐작 못할 고난을 겪으면서 현재에 이른 장광효. “부부와 가족 중심의 생활, 일을 벗어나서는 집에서 조용히 지내거나 청소, 요리, 장을 본다든지 산책을 하는 등 나만의 시간을 즐기며 재충전하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 책을 읽다가 잠이 드는 식의 일상을 단순히 즐기는 평화로운 생활이 나의 패션 세계를 더욱 깊게 했다. 또 불필요한 관계나 가식적인 일들은 가지치기를 하고 오직 가정과 나 자신의 내면, 일상에 충실하다보니 늙을 일도 없고 행복해지는 일만 늘어났다. 가끔 퇴근하는 길에 아내에게 어울릴 만한 옷이나 가방을 둘러보거나 성악가 아내가 무대에 설 드레스를 손수 만들어주는 일을 하며 보람을 느꼈다. 바로 이런 것들로 인해 내가 그 잘나가고 화려했던 시절보다, 더 젊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장광효, 세상에 감성을 입히다> 중에서) 이렇듯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은 그의 현재 모습은 한없이 평화롭고 여유로워 보였다.